우리가 기억해야 할 영웅, “피눈물 삼키며 수많은 전우 가슴에 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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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해야 할 영웅, “피눈물 삼키며 수많은 전우 가슴에 묻어”
  • 정하라 기자
  • 승인 2024.06.18 22: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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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호국보훈의 달 특집 // ‘내가 겪은 전쟁의 참상’

열여덟에 해병대 입대, 도솔산전투 승리로
“국가가 부른다면, 지금이라도 충성할 것”


“총탄과 수류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았는데, 구순이 넘는 나이에도 이렇게 정정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지금이라도 조국 대한민국이 나를 부른다면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지만, 그의 열정만큼은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던 열여덟 패기 어린 청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국전쟁의 살아있는 영웅이자 생생한 증인으로 남아있는 홍종수 장로(93·인천 은파교회 은퇴장로)를 지난달 30일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에 위치한 자택에서 만났다.

호국보훈의달 6월을 맞아 홍종수 장로를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에 위치한 자택에서 만났다. 1951년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홍 장로는 한국전쟁의 살아있는 영웅이자 생생한 증인으로 남아있다.
호국보훈의달 6월을 맞아 홍종수 장로를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에 위치한 자택에서 만났다. 1951년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홍 장로는 한국전쟁의 살아있는 영웅이자 생생한 증인으로 남아있다.

홍종수 장로는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소식을 듣고 1951년 4월 2일 열여덟 어린 나이에 해군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오직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8남매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당시 경찰이었던 둘째 형님 때문에 인민군들이 칼과 죽창을 들고 집에 찾아와 가족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홍 장로는 “가족을 위협하는 인민군들의 모습을 보면서 적개심에 불타올랐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싶은 마음에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나이가 어려 가족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아버지의 도장을 훔쳐 승낙서를 제출할 정도로 나라를 지켜내야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해병 7기로 입대한 그는 6·25전쟁 당시 북한 공산군에 맞서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칠청리의 도솔산을 혈전 끝에 탈환한 ‘도솔산 지구전투’에 참여했다. 도솔산전투는 해병 1연대가 난공불락의 전략 요충지인 도솔산을 확보하기 위해 북한군을 상대로 치열한 혈투를 벌여 승리로 이끈 역사적  전적이었다. 북한군 12·32 사단을 상대로 1951년 6월 4일부터 20일까지 24개의 도솔산 고지를 모두 탈환하면서 ‘무적해병’이란 신화가 만들어졌다.

“당시 휴전 선포를 앞두고 (땅을) 한 뼘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전우들의 희생을 뒤로하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17일 동안 점령하고 빼앗기는 혈전 끝에 24개 고지를 완전히 탈환하고 목이 터져라 외쳤던 ‘해병대 만세,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당시 도솔산에는 4천200명의 북한군이 중무장한 채 국군을 기다렸다. 적이 고지 곳곳에 지뢰를 매설하고 수류탄을 퍼붓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해병대는 야간에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치열한 전투를 벌여 고지를 점령했다.

6.25전쟁 당시 미국 해병대 1사단 5연대가 도솔산 전투를 시작했지만, 몇 번에 걸쳐 실패한 상황에서 탈환에 성공한 것이다. 이 전투를 통해 2천200명이 넘는 적을 섬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군도 7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산악전 사상 유례없는 대공방전이었다.

홍 장로는 “전투에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쟁의 참상은 너무 잔혹하고 끔찍했다. 빗발치는 총탄 사이로 바로 옆의 전우가 쓰러져 죽어갔다. ‘종수야 나 좀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면서도 그저 직진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닭 모가지 하나 비틀지 못했는데 전우가 쓰러져 죽는 모습을 보니 두려운 것이 없었고, 오로지 적을 향해 약진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전쟁의 참혹함에 피눈물을 삼키며, 그저 수많은 전우를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순방을 와서 어떻게 일개 연대병력만으로 2개 사단을 물리쳤느냐, 이것은 신이 경탄할만한 공헌이라고 하면서 ‘무적해병(無敵海兵)’이라는 친필 휘호를 하사하셨다”고 전했다. 

도솔산전투가 패하자 북한군은 실패의 오명을 씻기 위해 8월 31일 김일성·모택동 고지전투에 많은 병력을 동원했지만, 그곳에서도 대한민국 해병대가 모두 승리를 거뒀다. 그곳에서 해를 보낸 이후 중공군의 서부전선 침공으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1952년 3월 서부전선으로 내려왔다. 

해병대는 미군 해병 1사단과 함께 4차례에 걸쳐 맞서 싸운 결과 서부전선의 수도권 방어에 성공했다. 그는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중공군을 막았고 결국 휴전이 되면서 그사이 전쟁이 끝났다. 당시에는 깊은 신앙은 없었고, 누나들을 따라 교회에 다니는 정도였다. 그러나 총탄과 수류탄이 터지는 가운데서도 파편 조각 하나 맞지 않고 살아올 수 있음에 감사했고 교회에 다니며 점차 신앙심이 깊어졌다”고 말했다.

주님을 만나 뵙기 전, 그의 마지막 꿈은 남과 북으로 분단된 조국이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나라를 지키고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됐는데 아직도 38선에 가로막혀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현실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후대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말고, 저의 대에 이루지 못한 통일의 소망을 반드시 이루길 바랍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스무살의 앳된 청년은 90세가 넘는 백발의 노병이 되었다. 비록 주름은 늘고 몸은 노쇠해졌을지언정 그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구호를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선대가 어렵게 지킨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애국의 정신을 계승하는 일에 후대가 마음을 모아주길 기대했다.

홍 장로는 “전쟁은 총탄에 맞아 쓰러진 전우를 보고도 돌보지도 못한 채 앞으로 진격해야만 하는 참혹하고도 비탄만이 가득한 현장”이라며, “이 땅에 다시는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후대가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일에 앞장서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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