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설교학과 예배학의 기틀을 바로 잡은 한일장신대 명예총장 정장복 목사.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을 ‘성언운반자’로 지칭하는 그는 예배와 설교의 초점은 오직 하나님께 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흔이 넘은 고령에도 활발하게 집필활동을 하는 정 교수는 본지에 ‘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를 연재하면서 설교자의 자세를 비롯해 한국교회 설교의 위기, 설교의 본질과 설교의 정석 등에 대해 깊은 울림을 남겼다. 설교학교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이 시대 한국교회에 바라는 당부의 말씀을 들어보았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 예배와 설교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평생을 바쳐오셨습니다. 먼저 바른 예배와 바른 설교의 정의를 듣고 싶습니다.
-바른 예배와 설교 모두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중심’인가, 아니면 ‘사람중심’인가의 문제겠지요. 한국교회의 예배는 집회 형식이 강합니다. 왜냐하면 초창기 복음이 들어올 당시 집회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집회는 전도가 목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지지만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장로교의 원조로 알려진 스코틀랜드 교회는 초기에 왕이 들어와도 시선을 돌리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가르쳤어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 사람을 어떻게 모이게 하느냐, 그들을 어떻게 즐겁게 해줄까 이런 고민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죽으면 교회만 죽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죽어가게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말씀이 시들고 있어요. 다시 말해 세상도 시들어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목사님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한국교회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가장 시급한 개혁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물질만능주의가 원인이지요. 자본주의 사회 속에 한국교회가 속해 있다 보니 물질에 침몰당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균형 감각이 없습니다. 부끄럽지만 돈 앞에 가장 약한 사람이 선비 혹은 목사들이지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물질문명이 지배당해서 한국교회 안에 여러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회자는 청빈과 청렴의 상징이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아요. 물질을 극복하는 영성이 가장 시급합니다.
부흥하는 교회를 분석해보면 목회자의 설교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인격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성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에 탈선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화술이 좋고 말솜씨가 좋으니 설교는 잘하는데 메시지와 메신저의 괴리현장이 큰 것이 원인이라고 봅니다. 메시지는 잘 들었지만 메신저가 바른 사람이냐는 따져봐야 하는 것이지요.
설교는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설교는 누가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도구가 말씀을 전해야지 하나님이 미워하는 도구가 말씀을 전한다면 영향력이 없겠지요.
목회자가 설교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신학교에서부터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신학교육에 있어서 제안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육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성교육입니다. 신학교육은 ‘사람되는 교육’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신학교의 가장 큰 문제는 사실 교수들에게 있어요.
외국에서 박사학위만 받아오면 강단에 섭니다. 그건 잘못된 거예요. 교수들이 먼저 지성과 영성의 균일한 두 바퀴를 가지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지적인 바퀴와 영적인 바퀴는 사이즈와 속도가 같아야 전진합니다. 균형이 맞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가 없겠지요.
저도 유학을 했지만 공부하는 동안 외국에서 수업하고 과제 따라가기도 벅찹니다. 오히려 영적 고갈 상태에서 학위를 받아 오는 거죠. 그러니 제자들에게 영적 교육을 시킬 수 있겠습니까? 두 바퀴의 균형을 갖춘 교육, 지성과 영성의 겸비가 신학교육에 있어 중요합니다.
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신학 교수들의 재교육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목회자 재교육은 있는데, 신학자 재교육은 없습니다. 시급히 마련해야할 부분입니다.
내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종교개혁의 모토인데, 요즘 성경을 거의 읽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맞습니다.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지요. 교회가 쇠락한 영국을 바라보면서 예배당이 술집이 되고 호텔로 바뀐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한 곳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교회가 있어서 들어가 봤어요.
그곳에서는 순수하게 말씀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더군요. 그것이 종교개혁의 본 모습이지요. 말씀의 회복이 없이는 영성의 회복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두려울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말씀으로 수술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성경을 읽으면 좋을까요? 교수님만의 방법이 따로 있으십니까?
-하루 세 끼 밥을 먹듯이 저는 하루 세 번 성경을 읽습니다. 여유를 가지고 성경을 읽으니 얼마나 맛있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소리 내어 성경을 읽으니 귀로도 듣고, 눈으로도 읽고 입으로도 먹게 되는 것이지요. 성도들도 평범한 훈련부터 하면 좋겠습니다. 내년에는 성경을 읽는 운동이 일어나면 좋겠어요.
말씀에 힘이 실리고, 성령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변화와 감동이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한국교회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초기 설교와 지금 교회의 설교를 비교해주신다면?
-기독교 초기 설교자들은 메시지와 삶의 일치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더 파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주석도 원어사전도 없었습니다. “이 종이 그저 간절히 원하니 내 눈을 열어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밝히 보여달라”는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초기 설교자들도 그저 교재라고는 관주성경 하나 밖에 없었죠.
예화도 별로 없었고 오직 말씀 중심의 설교를 전했습니다. 지금은 설교가 목회의 방편인지, 사상의 주입인지 모를 정도로 훼손됐습니다. 말씀 위주, 하나님 위주의 설교가 초기 설교의 특징입니다. 우리도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요즘 같은 시국에는 목회자의 설교 하나도 민감합니다.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요?
-설교는 네 가지로 분류됩니다. 순수하게 예수님의 오심과 생애, 교훈과 수난, 부활, 승천, 재림을 전하는 선포적 설교와 바울서신과 같은 교리 설교, 성령님에 의하여 주도되는 목양, 치유설교, 그리고 사회적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적 설교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예언자적 설교가 절실하겠죠.
그러나 저는 이 네 가지 설교가 전부 균등하게 25%씩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네 가지는 비타민으로 본다면 A부터 D까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하나만 먹게 되면 병이 들겠죠. 영양의 균형이 골고루 잡혀야 합니다. 설교 역시 치우침 없이 말씀에 근거 해야 합니다. 정치사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성경말씀으로 분별하여 전한다면 귀담아 들을 것입니다.
설교를 전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듣는 회중들의 자세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어떻게 들어야 합니까?
-첫째, 설교자를 쳐다보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메시지에만 귀를 기울이십시오. 시대가 흐리면 흐릴수록 인간인 설교자를 쳐다볼 때 실망도 커지게 됩니다. 실망은 신앙을 떠나게 합니다.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설교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설교가 모두 비판적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그릇이 얼마나 넉넉한가에 따라 메시지가 들어가는 크기도 다릅니다. 회중의 그릇이 작으면 그만큼 밖에 설교가 전해지지 않습니다. 관용의 그릇을 준비하고 설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셋째로는 항상 긍정적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예배당에 가면 먼저 기도하고 오늘 성경 본문을 찾아서 그 말씀 속에 담긴 메시지를 먼저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메시지를 기대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만 자신에게 유익합니다.
다사다난했던 2016년도 저물어갑니다. 마지막으로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물질문명에 의해 영적 신경이 마비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내 마음과 정신, 모든 안테나를 하나님 말씀에 고정시키고 안테나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세요. 그 말씀을 생명의 원천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시대가 가면 갈수록 악해집니다.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힘들어집니다.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주님의 칭찬을 받는 인생을 살길 당부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가진 복수국적자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 시민권이 박탈되지 않도록 우리 잘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