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영향으로 한국교회가 튼튼한 주춧돌을 놓을 수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의 단초가 된 또 다른 역사, 그것은 4년 전 1903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일어났던 영적대각성운동이다. 바로 원산대부흥운동이다.
원산대부흥운동의 주역은 미국 감리교에서 파송된 로버트 하디 선교사였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6년 5월 24일 양화진선교사묘원에 세운 기념비에는 그를 이렇게 추모하고 있다.
“원산부흥운동의 위대한 불씨로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영적 대각성을 이끌어낸 주역이다. 이제 다시 영적대각성의 불길을 사모하고, 그가 이 땅에 남기고 간 사랑하는 두 딸의 흔적을 기억하면서 이 비를 세워 역사에 뜻을 기리고자 한다."
명문 토론토 의대를 졸업한 하디 선교사가 조선 땅을 밟은 것은 1890년. 이후 아내와 두 딸이 합류했고, 부산에 거주한 첫 서양인 가족으로 기록돼 있다. 의료사역을 시작했지만, 그는 영혼구원에 더 전인 사역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실패의 연속. 1892년 사역지를 원산으로 옮겼지만 역시 열매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 하디 선교사는 1903년 여름 선교사 수련회 기도회를 하다 크게 회심한다. 가는 곳마다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났다. ‘부흥회’란 말이 처음 생겨났다는 1904년, 하디 선교사가 했다는 고백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깨달은 후 그 첫 주일 아침 우리 원산감리교회 회중 앞에 서서 부끄럽고 당황한 얼굴로 나의 교만, 심령의 강퍅함, 그리고 믿음의 결핍과 또한 이것들이 가져다 준 많은 결과들을 고백하면서 처음으로 죄의 확신과 회개가 실제적인 경험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하디 선교사의 회개운동은 원산을 넘어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져갔고, 그 불씨 하나가 1907년 평양에 이르렀다.